1. 부자 스토리 1
첫 번째는 장충동입니다.
서울 주변은 바위가 노출된 골산(骨山)이 둘러싸고 있지만, 남산만큼은 흙으로 뒤덮인 육산(肉山)입니다.
골산에서는 기도발이 생기지만 육산에서는 돈이 붙는다고. 삼성의 이병철, 이건희는 장충동에 집이 있었습니다.
풍수에 거의 전문가급 식견이 있었던 이병철은 남산 자락이 내려온 장충동의 재물맥(財物脈)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눈이 9개가 달려서 그중 1~2개는 땅의 기운이 좋은 곳을 찾기 마련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CJ 이재현 회장 아들인 이선호가 고 이건희가 소유했던 장충동 1가 저택을 196억에 사들였다고 나왔습니다.
삼성가의 주손(胄孫)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매입입니다.
2. 부자 스토리 2
두 번째는 한남동입니다.
1960~70년대가 장충동이었다면 80년대 들어와서는 한남동이 재벌을 비롯한 한국 상류층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한남대교가 개통되고 자동차와 도로가 보편화한 탓입니다.
특히 이병철은 한남동이 가진 강물의 이점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한강이 돌아 나간다는 것은 돈이 모인다는 뜻입니다.
리움이 한남동에 있는 이유입니다.
돈도 돈이지만 기도발을 더 중시했던 통일교의 문선명은 유엔 빌리지 끝자락에다 본인의 거처 겸 신도들의 예배 장소였던 공관(公館)을
잡았습니다.
2006년 무렵 필자도 이 공관에서 문 총재와 차를 한잔한 적이 있었는데, 밑에서 올라오는 땅기운이 강한 곳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보통 사람은 힘들 수밖에 없는 강한 기운이 올라오는 용의 대가리 부위에 해당하는 터였습니다.
문선명은 이 터에서 재물도 축적하고 세를 모아 경기도 가평의 흰 대리석 건물인 천정궁(박물관)을 지었습니다.
3. 부자 스토리 3
세 번째는 성북동은 평창동보다는 터가 온화하다는 겁니다.
IMF 때에도 평창동은 빈집이 많이 나왔지만 성북동의 쓸만한 집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심 한복판이면서도 시골의 산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 만큼 산책 다니기가 좋습니다.
호암 이병철은 성북동을 특별하게 주목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호암이 70년대 초반 장충동에서 살 때는 문간방에 여자 도사가 몇 달씩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홍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외부 손님들은 홍 선생의 ‘영발 체크’를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불순한 의도를 숨기고 들어오는 사람을 감지하기 위한 특수한 검문검색이었던 셈입니다.
이 검색을 받아본 어느 재벌가의 나이 든 안주인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 배를 손으로 슬쩍 만져 보더니만 ‘따뜻한 사업을 구상하고 있구먼요’라는 말을 하더라고.
어찌 이 사실을 알까 하고 깜짝 놀랐어요”.
4. 삼성
6⋅25 이후로 남북한은 각각 물건을 하나씩 만들었습니다.
북한은 ICBM을 만들었고, 남한은 반도체를 만들었습니다.
ICBM이 이북의 체제를 유지해 주는 돈과 먹거리가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부도수표가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반도체가 현재 남한의 먹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건희 사후로 삼성이 상속세로 11조 원에 육박하는 세금을 납부한다는 것은 기업에는 부담이지만 국가로서는 축복입니다.
11조라는 엄청난 액수의 세금을 내는 기업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리 만만한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삼성이 있으니까 중국, 일본이 한국을 쉽사리 잡고 흔들지는 못한다고 봅니다.
나도 삼성의 흠을 알고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공칠과 삼(功七過三)입니다.
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 명 굶겨 죽이고 문화혁명으로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던 모택동에 대해서도 공칠과 삼이라고 등소평이 평가했는데, 삼성에 대해서 점수를 줄 건 줘야 합니다.
삼성의 반도체가 한국의 밥솥 단지 역할을 하게 된 배경에는 솥바위 전설이 깔려 있습니다.
의령군 남강에는 강 가운데에 가마솥단지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있습니다.
조선조 말기에 어떤 도사가 이 솥바위에 앉아서 ‘반경 30리 내에서 큰 부자 3명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백성을 먹여 살리는 부자가 나올 것이다’고 예언하였다고 합니다.
강물 속에는 솥바위를 받쳐 주는 다리가 3개 뻗어 있었습니다.
솥바위의 다리가 3개라서 부자 3명이 나온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솥바위 인근에서 삼성, 금성, 효성의 창업주가 탄생하였습니다.
호암 이병철이 왜 이름을 삼성(三星)이라고 짓게 되었는지 직접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필자의 추측으로는 이 솥바위 다리 3개 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호암(湖巖)이라는 호도 물속의 바위라는 뜻 아닙니까? 또 하나의 전설은 함양군 서상면 출신의 박 도사가 호암의 아들 3명 중에서 셋째인 이건희에게 사업을 물려주어야 번창할 것이라는 예언을 호암이 받아들인 점입니다.
장자상속 문화를 가지고 있는 유교 문화권에서 셋째에게 물려준다는 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닙니다.
해방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험한 예지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박 도사(제산 박재현⋅1935~2000)입니다.
호암이 삼성의 임원 승진 대상자들의 사주팔자를 자문한 도사가 박 도사이고, 박 도사는 살아생전 필자에게 ‘내가 사주가 좋은 젊은 인재들을 삼성에 추천해서 입사시킨 직원이 1000명이 넘는다’고 술회한 바도 있습니다.
이건희 인생이 ‘공수래공수거’는 아니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