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K레트로 이야기
고풍(古風)이 그립습니다.
옛날 냄새를 어디 가서 맡을 수 있을까요.
안동에 가면 고택(古宅), 고문(古文)이 아직 멸종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돈도 안 되는(?) 고택과 고문을 아직도 부여잡고 몸으로 지키고 있는 안동 양반 집안 후손들을 보면 그저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이 사람들이 없으면 어디에 가서 조선 선비의 체취를 맡을 수 있단 말인가요!
학봉(鶴峯) 김성일(1538-1593) 종가의 삼남 김종성(73).
사귄 지는 25년쯤 되는 것 같습니다.
영남 가풍을 잘 몰랐던 호남 출신 필자에게 안동 추로지향(鄒魯之鄕)의 깊은 이야기들을 해준 인물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허여(許與)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2.K한자풀이
허여(許與)는 깊은 사귐을 가리킵니다.
서로 간에 허여(許與)가 되는 관계는 동지적 결속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깔려 있는 관계입니다.
난세에는 서로 행보를 같이하는 운명 공동체까지 갑니다.
그러니까 허여의 관계는 아무 하고나 쉽게 맺는 관계가 아닙니다.
상당한 관찰과 검증을 거쳐야만 허여가 되는 법입니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이란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지역을 일컬을 때 쓰는 용어라고 합니다.
경북 안동 도산과 영주 순흥을 이 표현에 적합한 도시로 손꼽는 이가 많습니다. 영주는 고려 때 성리학을 중국으로부터 처음 도입한 안향 선생의 고향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세워진 곳이기도 합니다.
안향 선생의 성리학은 조선시대 통치사상으로 이어지며 퇴계 이황에 이르러 학문의 절정을 이룬 곳이고요.
당시 서원은 선현을 모시는 곳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사학과 같이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는 곳입니다.
안향의 학문적 영향이 살아 숨 쉬는 영주가 지금도 선비의 고장이라 불리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안동은 조선 최고의 사상가이자 교육자, 정치가인 퇴계 이황의 고향이지요.
동양의 주자라는 퇴계는 율곡 이이와는 쌍벽을 이루는 조선시대 대학자입니다.
조선조 정조가 퇴계의 치적을 말하며 그의 고향 안동을 추로지향이라 불렀습니다.
또 공자의 77대 종손인 공덕성이 도산서원을 방문해 추로지향이란 글을 남긴 것도 그의 학문적 위업을 알게 하는 내용입니다.
출처 : 경북매일(http://www.kbmaeil.com)
3.K교훈
60년대 초반. 한학자 벽사(碧史) 이우성(1925-2017)이 30대 후반의 새파란 시절이었습니다.
학봉종가를 찾아가서 고문서를 좀 보고 싶다고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종손은 김시인(金時寅, 1917-2008).
필자도 여러 번 뵈었지만 약간 무뚝뚝하면서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를 풍기는 선비였습니다.
김시인은 초면의 벽사 요청을 단번에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안 됩니다’. 얼마 후에 벽사가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에도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집안 문서를 함부로 보여줄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찾아갔을 때 벽사는 김시인에게 “저도 계남(溪南) 출입입니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계남 어디요?” “쌍취당(雙翠堂) 사위입니다”.
계남은 도산서원 근처의 냇물인 토계(兎溪)의 남쪽에 있는 마을 이름입니다.
퇴계 후손들의 집성촌입니다.
계남에 살았던 쌍취당은 종손 김시인의 증조부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의 매형인 이만운을 가리킵니다.
벽사의 부인이 쌍취당의 증손녀입니다.
김시인의 고모가로 8촌이 되는 셈입니다.
“계남 쌍취당이라면 문서를 보여 드려야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김시인과 8세 연하의 벽사는 허여의 관계가 되었다고 합니다.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음은 물론입니다.
1987년 학봉가의 고문서를 보관하는 운장각(雲章閣)을 건립할 때 그 이름도 벽사가 작명한 것입니다.
90년대 중반부터 영남학파의 좌장 역할을 하였던 벽사는 학문이 한참 무르익기 시작하던 젊은 시절에 학봉가와 이런 허여가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