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명당에서 몇 시간 놀다 오면 몸에 정기가 충전되는 것 같다. 앞이마 쪽으로 기운이 짱짱하게 충전되는 맛이야말로 산의 맛이다. 골산(骨山)의 향이 에스프레소라고 한다면 육산(肉山)은 커피의 콜드브루 맛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 맛도 모르고 죽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산의 에너지와 기운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 나 같은 풍수 마니아에게는 약점이 있다. 식물과 약초에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이름을 알아야 대화가 되는 법. 꽃과 약초 이름을 모르니까 풍성한 대화가 어렵다. 가끔 식물 도감을 펼쳐 놓고 공부는 해보지만, 역시 전문가를 만나야 공부가 쉽게 된다.
강원도 점봉산을 오르다가 약초꾼 태산을 알게 되었다. 경력 25년 차였다. 주중에는 서울에서 약초 백숙 식당을 운영하다가 주말이 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을 탔다고 한다. 내가 슬며시 한마디 던져 보았다. “산신령 만나 봤나? 산신령 못 만나 봤으면 헛방인데?” “계방산 운두령(1089m) 고개에서 텐트 치고 잠잘 때 하얀 소복 입은 여자 2명이 꿈에 나타난 적은 있다. 그 꿈 꾸고 산삼 두 뿌리 캤다. 소복 입은 여자는 산신령이 보낸 심부름꾼 아니겠나!” 태산의 설명에 따르면 산의 정기는 산삼에 뭉쳐 있다는 주장이다. “산삼도 못 먹어 봤으면 산의 정기를 안다고 할 수 없다”며 나를 쥐어박았다.
그는 나에게 현장 강의를 했다. 우선 산삼 씨는 껍질이 두껍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새가 산삼 씨를 먹고 위장에 들어가야 이 껍질이 녹는다. 껍질이 녹은 상태에서 새가 똥을 싸면 산삼 씨가 자연스럽게 발아한다. 조복삼(鳥腹蔘)이다. 산삼은 발아하면서 처음에는 잎사귀가 3장 나온다.
4~5년 자라면 잎이 5장으로 늘어난다. 5장이 되면 이때부터 산삼으로 인정한다.
다시 2~3년 자라면 옆으로 가지가 하나 뻗는다. 가지가 뻗으면서 잎사귀도 3장이 새로 솟는다. 그러다가 2~3년 더 자라면 잎이 2장 추가된다. 잎사귀가 총 10장 된다. 좀 더 자라면 다시 가지가 하나 새로 나오고 여기에 잎이 3장이 솟아나오고 좀 더 있다가 2장이 추가로 자란다. 가지 하나마다 이파리는 5장이 붙는 게 산삼의 습성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자란다. 가지가 6개가 되면 잎사귀는 30장이 된다. 드디어 산삼의 완성태이다. 이걸 ‘육구만달’이라고 부른단다. 대략 30년이 걸린다. 등산 물병에 있던 산삼주 한잔을 얻어 먹으니까 역시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조용헌(1961~ )은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석좌교수를 맡고 있는 대한민국의 칼럼니스트이다.
<생애>
조용헌은 1961년 전라남도 순천시 출신이다. 원광대학교와 원광대 원불교대학원 불교민속학 석사학위를 받고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대한민국의 칼럼니스트로 《조용헌의 휴휴명당》, 《서울의 재발견》, 《두승산 유선사》《동양학을 읽는 아침》,《조용헌의 인생 독법》을 저술하였다.
2004년 9월 1일부터 조선일보에 조용헌의 살롱을, 농민신문에는 조용헌의 주유천하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조용헌은 강호江湖에서 만난 유儒.불佛.선仙 고수들과 교유하며 체득한 콘텐츠를 융합해 동양학의 관점에서 체계적.대중적으로 풀어낸, 이른바 '강호동양학' 학자라고 자칭한다.
2012년 6월 4일 매경이코노미에 [조용헌의 八字기행] 食神生財 …베풀어 인심을 사면 돈은 따라온다를 썼다. 대표적인 친일 기업가 문명기의 장삿꾼 행적을 서술한 것인데 그가 큰 재물을 갖게 된 원인이 베풀어 인심을 사면 돈은 따라온다로 결론을 맺는다.[1]
2014년 3월 17일자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에서 ‘대구의 여걸(女傑)’이라는 글을 썼다.[2] 여기에서 일제하 대표적인 친일 기업인인 문명기의 딸 문신자를 등소평에 버금가는 문소평이라고 거론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 내용은 2017년 펴낸 <동양학을 읽는 아침>에 들어있기도 하다.
그곳에서 “중국에는 등소평이 있고, 대구에는 문소평이 있다”로 시작하는 글 내용에서 문씨에 대해 등소평과 버금간다는 뜻인 ‘문소평’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칭송하는 이야기로 나타냈다.[3] 그의 아버지 문명기(文明琦, 1878∼1968)씨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녀의 어머니가 딸에게 미친 특이한 가정교육까지 적었던 것이다.
이 글을 본 경북 청송에 사는 지○○씨가 지역신문인 고향신문에 느낀 비애와 울분을 토로하며 올렸는 바, 그 제목이 ‘친일파 후손 문ㅇㅇ씨 극찬하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며’였다.
아직도 친일파 후손들이 전국 도처에서 부(富)를 굴리며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반면에,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군이나 의병장의 후손들은 가난에 치를 떨며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현실에서 보은(報恩)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나게 해주는 정의로운 글이었다는 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