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茶) 밭에서 놀다
백 살까지 사는 세상에 인생 이모작은 뭐를 할까? 글을 안 쓰면 뭐를 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 대안으로 차(茶)를 만드는 ‘제다(製茶)’ 일을 해 보면 어떨까요.
우선 나 자신이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합니다.
음차흥국(飮茶興國)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차를 마셔야 사람들의 건강이 좋아지고 정신이 맑아지니까 말입니다.
차는 사시사철 녹색의 푸르름을 간직한 나무이자 식물입니다.
푸르른 차밭을 바라보는 것도 좋고, 안개 낀 아침에 차밭을 거니는 것도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원고 마감의 압박감을 누그러뜨리면서 ‘이만하면 괜찮은 인생이야’ 하고 나를 달래준 것도 차입니다.
유럽에서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구릉지대에 펼쳐진 와이너리에 가서 그 어떤 충족감을 느낀다고 한다면, 한자 문화권의 아시아 사람들은 차밭에 갔을 때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고 합니다.
서양 포도밭의 대구(對句)는 동양의 차밭입니다.
차밭에서 생각을 정리한 중국의 우정량이라는 사람이 꼽은 차의 10가지 덕성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6가지를 추려봅니다.
①우울한 기분을 흩어지게 한다(茶散鬱氣)
②차는 생기를 북돋운다(茶養生氣)
③병을 제거한다(茶除病氣)
④차로써 공경을 표한다(以茶表敬)
⑤몸을 닦는다(以茶修身)
⑥마음을 고상하게 만든다(以茶雅心)이다.
요즘 한국 사람들의 일상은 너무나 우울합니다.
상대방을 너무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평화롭게 사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정치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인데, 이 사이비 종교를 믿는 광신자가 너무 많아져서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합니다.
거품을 물면 사이비 종교의 징표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게거품을 씻기 위해서라도 나는 오늘 혼자 찻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한 잔의 차를 마십니다.
우울을 없애고 생기를 북돋우기 위해서입니다.
남들 다 게거품을 물고 살든지 말든지 제 팔자입니다.
도가(道家)의 노선은 사회 구원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노선입니다.
나는 도가이니까 차밭이나 둘러봐야겠습니다.
봄에는 곡성에 있는 야생 차밭 ‘산절로 야생다원’에서 찻잎을 따 보았습니다.
짜증 나는 더위가 가신 엊그제 초가을에는 강진의 ‘이한영 차문화원’에 가서 1박 2일 제다(製茶) 교육을 받았습니다.
차에는 6대 다류가 있었습니다.
녹차, 백차, 청차, 홍차, 황차, 흑차였습니다.
6가지 차마다 각기 색깔도 달랐습니다.
향기도 달랐습니다.
맛도 달랐습니다.
6가지 차향을 맡다 보니 마음속의 근심이 줄어듭니다.
2.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
‘유어예(遊於藝)’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놀기는 놀더라도 ‘예(藝)’ 안에서 놀면 후유증이 적습니다.
그 예가 종합적으로 녹아 있는 공간이 원림(園林)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림은 한자 문화권의 상류층과 식자층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공간입니다.
나는 원림을 좋아해서 시간만 나면 중국의 졸정원(拙政園)을 비롯한 전통 정원들을 보러 다녔습니다.
특히 양주의 원림 중에서도 개원(价園)이 취향에 맞았습니다.
일본 교토의 정원만 해도 볼만한 곳이 금각사 정원을 비롯하여 20여 군데가 넘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정원(원림)들을 조성하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점입니다.
가산가수(假山假水)를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원림은 돈이 적게 들면서도 그 효과는 크게 누릴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자연에 있는 진산진수(眞山眞水)이기 때문입니다.
호남의 양대 원림인 담양 소쇄원과, 강진 백운동 원림이 그렇습니다.
백운동 원림은 진산(眞山) 중의 진산인 월출산 자락 남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원림의 핵심인 석가산(石假山)이 필요 없습니다.
뒷산이 바로 엄청나게 기가 센 월출산 옥판봉이 산수화처럼 도열해 있지 않은가!
옥판봉은 마치 금강산 만물상 같은데, 중국, 일본 정원의 석가산은 감히 여기에 대지도 못합니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왔을 때 원주 이 씨들 소유의 이 백운동 원림에 출입하게 되었고, 백운동 주인의 어린 아들인 이시헌(李時憲)이 9세 때부터 다산 문하에서 놀게 되었습니다.
다산은 강진 유배가 끝나 1818년 두물머리로 돌아가면서 18명의 제자와 다신계(茶信契)를 맺었습니다. 이시헌은 당시 17세로 나이가 어려 다신계의 공식 멤버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경기도 두물머리의 다산에게 월출산 옥판봉 밑의 찻잎으로 떡차를 만들어 꾸준히 보낸 제자는 이시헌이었습니다.
이후로도 백운동 집안은 100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다산가에 차를 보내는 신의를 지켰습니다.
차의 제조 방식은 다산이 직접 알려준 삼증 삼 쇄(三蒸三曬)의 방식이었습니다.
3번 솥에다 찌고 3번 말리는 방식.
다신계의 약속은 이시헌의 손자뻘인 이한영(李漢永·1868~1956)에 의해 지속되었습니다.
또한 이한영은 왜정 때인 1920년대에 우리 차가 일본 상표로 둔갑하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어서 ‘白雲玉版茶(백운옥판차)’라는 국산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한국 최초의 차 브랜드입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다부(茶父)입니다.
이한영이 살았던 집이 원림 옆의 월남사지 3층 석탑 아래에 있었고, 그의 고손녀 이현정이 삼층석탑처럼 꿋꿋하게 차명문가(茶名門家) 집안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3. 목압서사(木鴨書舍)
그래도 영남에 양반 문화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다른 지역은 거의 사라졌는데 말입니다.
양반의 유풍은 이렇습니다.
한적(漢籍)에 관심이 많습니다.
조상의 문집을 번역하려고 회사 퇴직금이라도 일부 밀어 넣습니다.
문중과 집안에 대한 연대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습니다. 집안 욕먹는 처신은 되도록 안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약간의 손해는 감수하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약속은 될 수 있으면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신뢰를 못 지키면 양반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약속을 할 때도 신중하게 정합니다.
허교(許交)라고 하는 검증 기간을 거쳐서 마음의 문을 열지, 단 기간 내에 곧바로 ‘형님, 동생’ 별로 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동군 화개 골짜기에 목압서사(木鴨書舍)가 있습니다.
한문 서당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직장 생활하다가 정년하고 화개로 귀촌해서 사는 조해훈(62) 선생이 무료로 운영하는 서당이었습니다.
귀촌해서 한가하게 살지 웬 서당을 운영하나?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돈도 안 되는 일에 정력을 쓰면서 한문 공부하는 우직한 사람들을 보면 그 출신 성분이 대강 짐작되는 바가 있습니다.
“고향이 영남 어디요?”
“대구 달성군 논공읍 갈실 [蘆谷] 마을의 함안 조아요. 단종 때 벼슬을 버리고 함안에 내려왔던 인물인 조려(趙旅)의 후손들로서 대대로 학문을 중시했던 집안이오. 문과 급제자도 34명을 배출했으니 책 보고 공부하는 게 우리 집안 전통이오.”
“왜 하필 지리산 화개 골짜기로 귀촌을 한 거요?”
“조부 때부터의 꿈이 화개에 들어와 서당 열고 공부하면서 화개차(茶)를 덖어서 마시는 일이었기 때문이오. 조부, 아버지가 못 이룬 꿈을 내 대에 와서 이룬 셈이죠.”
조부인 조 차 백(趙且伯·1890~1963)도 차를 좋아해서 매년 4월이 되면 고향 달성에서 지리산 쌍계사까지 와서 한 달간 머무르며 집안사람들이 마실 차를 만들곤 했습니다.
당시 쌍계사에는 중국에서 덖음차 제조 기술을 배워온 청파(靑波) 조병곤(趙秉坤)이 머물고 있어서 이 양반한테 기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아버지 조길남도 할아버지 따라서 유년 시절부터 찻잎 따는 계절이 오면 쌍계사에 머무르곤 하였습니다.
빚보증 때문에 부산 단칸방에 사는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청학동이 가까운 화개 골짜기의 낭만적인 풍광과 차를 잊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목압은 신라시대 나무 오리를 날려 절터를 잡았던 목압사(木鴨寺)가 있었던 절터이었습니다.
조부, 아버지의 꿈을 대신해서 산골짜기에 서당을 열고 차를 만들며 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