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주이 씨들에
필자는 호남 출신이지만 그동안 영남의 명문 집안에 관심이 많습니다.
고택이 남아 있고, 후손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약을 하고 있고,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나 할까요?
영남 집안들에 주력하다가 최근에 주목하게 된 집안이 호남 강진(康津)의 원주이 씨(原州李氏)들입니다.
원주이 씨들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월출산 때문입니다.
필자는 굉장한 바위 덩어리로 이루어진 월출산을 영발(靈發)의 관점에서 주목해 왔습니다.
영발 앞에서 가방끈은 무력한 법이니까 말입니다.
한마디로 ‘기도발’이 최고인 산입니다.
그중에서도 월출산 구정봉(九井峰)은 선사시대 이래로 전라남도 해양민족의 종교적 성산으로 주목받아왔던 성지였습니다.
그런데 구정봉을 강진의 경포대 쪽에서 올라가다 보니까 산속의 커다란 바위에 ‘原州李氏仟(원주이 씨 천)’이라고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요!
아니 월출산이 원주이 씨들의 산이란 말입니까?
영산인 월출산을 가지고 있는 원주이 씨들은 어떤 집안이란 말인가요?
나의 쌍권총 중 하나가 종교적 영발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명문가 족보입니다.
좌영발(左靈發), 우족보(右族譜)입니다. 곧바로 좌영발에서 ‘우족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월출산이 원주이 씨들의 산일까?
원주이 씨들이 내놓을 만한 문화유산은 백운동원림입니다.
월출산 구정봉의 맥이 강진 쪽으로 흘러내려가다가 끝자락에 기운이 뭉친 지점에 백운동원림(白雲洞園林)이 있습니다.
원림(園林). 이것은 21세기에 가장 필요한 문화유산입니다. 사는 게 너무나 골치가 아픕니다.
릴랙스(relax)가 너무나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릴랙스는 쉽게 되는 게 아입니다.
삶의 긴장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쉽게 들러붙지만, 이 긴장을 풀어내는 이완의 방법은 아주 어렵습니다.
고난도의 지도가 곁들여져야 합니다.
릴렉스 못하면 공황장애와 이른바 ‘번아웃’이 기다리고 있고, 그다음에는 암입니다.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살아야 생존이 되는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이완 방법은 자연과 숲, 그리고 계곡입니다.
백운동원림에는 이게 다 있습니다.
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자기(地磁氣). 이것을 서양에서는 가이아, 즉 지모신(地母神)으로 불렀습니다.
월출산에는 엄청난 지자기가 뭉쳐 있습니다.
고대부터 검증된 산입니다.
특히 백운동원림 뒤로는 고단백의 지자기가 뭉쳐 있고, 대나무와 동백, 그리고 초봄에는 매화, 늦봄에는 영산홍이, 가을에는 국화가,
겨울에는 대나무와 동백이 있습니다. 원림을 둘러싸는 자그마한 계곡이 있어서 물소리까지 들립니다.
3. 최고의 풍류 유상곡수
더군다나 백운동 원림 속에는 유상곡수(流觴曲水)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경주 포석정처럼 흐르는 물에다가 술잔을 띄울 수 있는 시설 말입니다. 한자 문화권 최고의 풍류가 유상곡수입니다.
바로 왕희지와 그의 친구들이 벌였던 풍류잔치가 난정(蘭亭)에서 있었고, 역대로 이 술잔 띄웠던 파티를 동양 식자층들은 천몇백 년 동안 그리워했습니다.
원림 담벼락 밑으로 계곡 물을 끌어들여 마당에 2개의 연못을 거쳐서 지나가도록 했고, 그 계곡물이 흘러갈 때 여기에다 술잔을 띄워 보냅니다. 흘러가는 계곡 물을 따라 너울너울 술잔이 다가오는 모습.
너무나 낭만적이지 않은가! 죽어도 잊지 못할 풍류입니다.
이런 풍류를 겪어보아야 자기 마음이 열리고, 자연이 눈에 들어오고, 인간을 용서할 수 있고, 뭉친 긴장이 풀리는 것입니다.
도법자연(道法自然)입니다.
풍류의 최고봉은 자연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자연 속에 자기를 푹 담가야 합니다.
푹 담그면 자기 가슴속에 자연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을 매개하는 수단이 술잔이 아닌가 싶습니다. 흐르는 물을 타고 다가오는 술잔. 그리고 그 술잔을 받은 사람은 시를 지어 답례합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 즉석에서 술 한 잔과 시 한 수를 맞바꿀 수 없는 사람, 그 정도의 콘텐츠가 없는 사람은 이 백운동 원림에서 놀 수가 없었습니다.
다산과 초의, 그리고 김창흡·김창집 형제, 소치 허련 등등. 당대의 수많은 문사들이 이 원림에 들러서 시를 남기고 기록을 남기고 갔습니다.
가히 호남의 일류 살롱이었습니다.
담양의 소쇄원도 좋고, 보길도의 부용동 정원도 좋습니다.
하지만 백운동은 뒷배경인 월출산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동양의 고대 신화에 나오는 산수화의 배경 속에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압도적인 풍광 속에 있을 때 시간이 정지된다는 느낌이야말로 최고의 릴랙스가 아닐까요!
참고로 정민 교수가 펴낸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에 보면 다녀갔던 명사들이 남긴 기록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주이 씨 집안의 또 다른 특징은 선가적(仙家的)인 분위기입니다.
우리나라 유·불·선 중에서 선가는 조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취가 보일 듯 말 듯하답니다.
하지만 유가와 불가를 중간에서 회통시키는 종교가 선가라고 생각합니다.
선가는 세상에 전면적으로 드러내 놓고 나서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적 노선과 비슷합니다.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앞장서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이 종교입니다.
산림 속에 한가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21세기에도 선가는 어필합니다.
백운동 원림을 만든 이담로(李聃老·1627~1701)는 선가적 취향의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유가의 선비지만 속으로는 신선을 모델인격으로 지향했던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외유내선(外儒內仙)이라고 필자는 보고 싶습니다.
이담로라는 이름의 담(聃) 자가 노자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담로(聃老)라는 이름 자체가 노자(老子)를 연상시킵니다.
본인 이름에 이처럼 강렬하게 노자를 집어넣은 경우는 못 봤습니다.
4. 외유내선의 인물 이담로
원림의 정선대(停仙臺)라는 명칭에도 ‘仙(선)’이 들어갑니다. 원림을 오고 갔던 수많은 명사들의 시문에서도 신선에 대한 흠모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원림 자체가 신선이 사는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 정원에는 선가적 이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로 살벌하게 사약과 유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많은 유가의 선비들이 선가적 의식세계로 넘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선가적 지명의 한 예가 전국에 널리 퍼진 무슨무슨 동천(洞天)입니다.
신선이 사는 공간을 동천이라 일컫습니다.
백운동은 전형적인 동천으로 보아야 합니다.
필자가 원주이 씨 집안을 보면서 흥미를 느낀 점은 명당입니다.
이 집안사람들이 대대로 풍수에 조예가 깊었던 흔적이 보입니다.
종택이 있었던 금당리(金塘里), 금당리에서 이담로가 옮겨간 곳이 백운동(白雲洞), 백운동에서 다시 분가하여 이사한 곳이 월남사지 3층석탑이 있는 월남리(月南里)입니다.
모두 터가 좋습니다.
금당리도 이 일대에서 명당으로 소문난 장소입니다.
연꽃이 가득한 연못(金塘)이 있고, 그 연못 뒤로 종택이 있습니다. 지금은 종택이 비어 있습니다. 종택의 마루에서 정면을 바라다보니 좋은 문필봉이 보입니다. 종택 앞으로는 연못이라는 혈구(穴口)가 있고 그 너머로 문필봉이 있으니 문한(文翰)이 끊어지지 않는 터입니다.
5. 집터마다 문필봉이 보이는 명당
동네 주변의 봉우리들도 악살(惡殺)이 없다. 부드러운 봉우리들이면서 형태들이 다 원만합니다. 풍수 고단자의 소점(所占·터를 잡는 것)이 분명합니다. 백운동 원림에도 가보니 이담로의 묘가 뒤에 있고, 이 묘에서 약간 오른쪽을 바라다보니 역시 문필봉이 보입니다. 동네에서는 월각봉(月角峰)이라고 부른답니다. 이담로가 백운동 터를 잡을 때부터 이 월각봉이 좋은 문필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죽어서도 봉우리가 보이는 이 지점에 본인의 묘를 쓰도록 사전에 점지해 놓았던 것입니다. 이담로가 남긴 문건인 ‘백운동장백해(白雲洞藏魄解)’에 보면 ‘살아서는 집 짓기에 좋고, 죽어서는 묻히기에 좋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에 문필봉인 월각봉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 집안이 호남의 내로라하는 문한가(文翰家)에 들어가는 풍수적 근거는 문필봉입니다.
‘한국차의 아버지(茶父)’ 소리를 듣는 원주이 씨 이한영(李漢永·1868~1956) 생가도 그렇습니다. 생가터에서 바라다보면 정면에 있는 봉우리도 문필봉이고, 약간 우측으로 월각봉이 보이는데 그 오른쪽으로 다시 자그마한 문필봉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대략 3개의 문필봉이 보이는 지점에 이한영 생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금당리·백운동·월남리 3군데의 공통점은 문필봉입니다. 부자 되는 터는 아닙니다.
돈을 욕심 내지는 않았습니다. 이 집안사람들은 문필봉이 보이지 않는 터에는 아예 자리 잡을 생각을 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만큼 학문과 문장을 높은 가치로 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후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대로 집안 어른들이 풍수에 조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주이 씨들의 풍수적 식견의 뿌리를 소급해 올라가니 한 인물이 나타납니다.
이의신(李懿信)입니다. 대략 광해군 대에 활약한 국지사(國地師) 급입니다. 국지사라고 하면 궁궐에 소속된 국가대표급 지관을 가리킵니다.
6. 교하천도론 펼친 이의신
이의신은 교하천도론(交河遷都論)으로도 유명합니다. 한양의 도읍지를 지금의 경기도 교하(交河)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이 교하입니다.
수운(水運)의 중심지에 도읍지를 잡았으면 어땠을까요? 수상 물류가 활발해지면 상공업이 더 발달했을 것이고, 상공업이 발달하면 국가 경제에 활력이 생기고, 이 활력이 생기면 조선왕조가 성리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좀 더 개방된 사회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의신은 원주이 씨로서 고산 윤선도의 고모부에 해당한다고 구전으로 전해집니다.
고산도 풍수 전문가였고, 고산이 잡은 터들도 범상치 않습니다.
그 밑바탕에 고모부였던 이의신의 가르침이 작동했다고 여겨집니다.
윤선도의 묘가 있는 해남의 금쇄동도 원래는 이의신이 점찍어 놓았던 명당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처조카인 윤선도에게 넘어갔습니다.
이의신의 고향인 해남의 맹진리(孟津里)에 가보니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가 소년시절에 고개 넘어 서당으로 갈 때 길목에서 흰여우가 변신한 어느 낭자를 만나 그 낭자로부터 구슬을 받아 삼켰다는 전설입니다.
백여우로부터 받은 구슬을 삼켰기 때문에 그가 땅을 꿰뚫어 보는 신통력을 얻게 되었다는 게 요지입니다.
야호(野狐) 신앙의 흔적입니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토착신앙으로 백여우를 숭배하는 토속신앙이 있었습니다.
이때 백여우는 인간에게 신통한 능력을 줄 수 있는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고대 동북아시아의 토속신앙인 이 야호신앙은 이단시되었고, 민간 신앙이나 전설에서만 그 흔적이 남았는데, 이의신의 풍수 능력에 야호신앙의 흔적이 보입니다. 아무튼 원주이 씨 집안에 걸출한 풍수의 대가가 배출되었고, 그 영향으로 이 집안사람들이 해남·강진 일대에서 좋은 명당자리들을 선점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듣자 하니 금당리 터도 이의신이 잡았다는 것 같습니다.
문필봉에 터를 잡은 이 집안에서는 여러 학자와 문한(文翰)이 배출되었습니다. 먼저 이빈(李彬·1597~1642)입니다. 조선의 삼당시인으로 유명한 옥봉 백광훈의 외손입니다.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시를 주고받는 접대역을 맡았는데, 이빈과 같이 시를 지었던 동류가 택당 이식, 동명 정두경이었다고 합니다. 당대의 일류 문장가들 아닌가. 당시 조선에 왔던 중국 사신 강왈광은 이빈을 신선 같은 인물이라고 높게 평가했다고 전해집니다. 벼슬은 사간원 정언, 병조정랑을 지냈습니다.
백운동 주인 이담로는 당대의 명사들과 수많은 시문을 지어 교류하였으며 저술로는 ‘견한록(遣閑錄)’과 ‘구조친책(國朝親策)’ 등이 있습니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